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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즈노프로 플렉시엘리트 가죽의 바둑이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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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Kiar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회   작성일Date 24-08-1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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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은 엘리트바둑이 상대와의 소통이요, 배려다. 수담(手談)을 통해 배우는 느림의 미학이다. 치열한 경쟁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속에서도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찾아보려는 여유가 삶의 숨통을 트게 한다. 바둑을 두는 시간이 그러하다. 물론 좋은 친구가 함께해야 한다.​바둑을 처음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광화문통 아이들이었던 암담한 대학입시 재수생 시절에 심심파적으로 하숙을 같이 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깨너머로 배웠지 싶다. 친구 김영용의 얼굴이 희미하게 스치는 것으로 보아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산악반에 들어 북한산 산행을 가는 일 이외에는 벌써 사법고시 공부를 흉내 내는 법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바둑을 두었다. 잘 사는 김종원 친구가 잘 두었던 것 같다. 두 친구는 가끔 스치며 부러 바둑을 두기도 하며 평생 돈독한 우정을 쌓기도 한다. 나에게는 어느덧 바둑이 나의 도피안(到彼岸)인 넬라 판타지아가 되어가는 듯했다. 50년이 훨씬 넘는 아련한 기억이다.​지성의 열풍지대에서 푸른 꿈을 꾸기에도 벅찼던 대학시절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되고 군사독재자의 지명수배에 쫓겼다. 신촌 엘리트바둑이 시장에 있는 야지다방 윗층의 기원에 은신처를 만들어 숨어들기도 했다. 지금 내 나이인 노인 애기가(愛棋家)들과 내기 바둑을 두며 한 끼를 해결하는 몇 달을 보냈다. 이름 모를 그분들이 젊은이의 사정을 미뤄 짐작하고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끔 일부러 져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쫓기는 자의 긴장을 이겨내는 해방구였음에는 틀림없었다. 군대에 잡혀가서는 방책선 내무반에서 막무가내인 선임하사의 바둑 적수가 되면서 쓸데없는 수모도 겪기도 했다. 바둑이 무료함을 달래는 엘리트의 놀이라는 그때의 선입견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작된 바둑에의 사랑은 50년 넘는 유일한 취미생활로 삶에 녹아 있다.​대학을 마치고는 출판을 직업으로 해서인지 사무실이 가끔씩 기원으로 변하기도 한다. 교수, 문인들과의 접대바둑이 옛날식 영롱한 그림으로 모자이크된다. 수담(手談) 한두 판으로 헤아리게 되는 상대방 삶의 정직한 한 구석으로 서로의 공유지를 넓혀가기도 한다. 책 만드는 일이 어쩌면 사람 알아보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라면 바둑도 조그만 열쇠 역할을 했다. 옛말에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보라 했듯이 이 덕목에 엘리트바둑이 바둑 두기를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둑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라는 편견이 슬슬 똬리를 틀기도 했다. 사람 사는 테두리가 그렇게 넓고 깊은 것 같지만 처음 만날 때 얼핏 스치는 전통적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의 관계망에도 쑥스러움을 몰아내는 무장해제를 하게도 한다. 나에게는 바둑도 그러한 것 같다. 바둑을 둘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크기 때문이다. 출판을 하면서 수천 명의 저자, 역자와 시대를 논하고 문화를 논하며 스쳐 지나갔지만 수담(手談)을 나눈 사람들이 그래도 추억 속에서도 아른거리는 것이 이런 이유일 것이다. ​30년 전 서초동에 출판사 사옥 신축을 준비하던 무렵에는 바둑친구 김동찬 사장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를 포기하고 양재역 앞 그의 사옥을 넘겨받아 지금의 ‘지훈빌딩’의 모체가 되기도 한다. 그때 뉴질랜드로 이민 갔던 그가 이제 귀국하여 나와 바둑판 앞에 앉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꾸 나를 이기려 드는 그이의 소롯한 야망만은 변화가 없다.​이제 축사 원고청탁을 뿌리칠 수 엘리트바둑이 없는 인연을 적어야 한다. 양상국 사범이 바둑 보급 프로그램 개척으로 성직자와 같은 삶을 사는 모습을 30년 넘게 지켜보았다. 위대한 보급프로 생애로 바둑문화의 전도사의 길을 평생 실천한다. 군사작전 용어가 유별나게 난무하는 바둑판의 쟁투 속에 누군들 절정의 순간을 움켜쥐려는 승자의 독식을 꿈꾸지 않겠는가. 수담(手談)과 수신(修身)의 도를 닦는다는 바둑이 승리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스포츠로 분류된 현실이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부러워하던 스쳐지나간 별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양 사범은 사람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바둑을 사랑하는 바둑 인구를 품을 수 있는 큰 저수지를 구축하여 바둑세계가 더욱 양양한 대해로 승천하기를 꿈꾸는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양 사범은 신의 한 수를 둔 것이다. 그 길은 화려하지도 않고 평생을 몸 바쳐야 하는 또 하나의 고난의 길이었지만 인간 양상국은 어느 성자처럼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호시우행(虎視牛行) 우보만리(牛步萬里)라 했다. 이러한 양상국 사범의 삶의 길에서 우직하게 걷는 소가 발을 헛디디는 실족은 없다. 내가 옳다고 엘리트바둑이 믿는 길을 쉼 없이 가는 사람만이 뜻을 이룰 수 있다. 양 사범은 바둑을 통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좋아한다. 무림의 고수를 발굴한다기보다는 바둑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강한 애기가를 찾아내 프로기사와의 대국을 선물해 아마추어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그가 주선한 두세 차례 강명주 형과의 맞수대결이 TV에 방영되어 쑥스럽지만 내가 바둑을 제법 잘 두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바둑 한 판으로 맺은 인연을 죽마고우(竹馬故友) 관계로 승화시키는 비책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며, 그것이 오랫동안 한결 같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양 九단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각자의 삶에서 특별한 일이 된다. 그는 어떤 의미의 사람부자임에 틀림없다. 이번 책 ;을 위해 우정 바둑 한 판을 새로 두자고 청해 기보를 채록하는 그의 성실성에 감동하게 되는 것도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착한 관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원고 청탁을 받고서 오히려 내가 감사의 엘리트바둑이 마음을 보내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양 사범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수담을 통해 많은 것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삶을 아름답게 성숙시켰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양 사범은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성공적 삶을 산 것이라고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양 사범의 삶을 얼핏 살펴보아도 그의 내공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에서 성자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추는 것은 당연하다. 스무 살에 전문 프로기사의 등용문에 도전하여 일생일로의 길을 걸어 1970년 꼬박 3년의 방황 끝에 서봉수 프로를 꺾고 입단 서열 5번째로 입단한다. 이때 산사(山寺)에서의 고행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지금까지도 그때 터득한 현현기경(玄玄棋經)을 밑자락으로 깐 바둑의 원리이자 인생훈의 동양사상 철학에 거칠 것이 없다. 바둑만 배우려 일본 유학이 대세일 때였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대목이다. 이후 36년 만에 2006년 九단으로 입신(入神)한다. 1977년 여성바둑연맹 출신과 결혼하여 바둑 패밀리를 이룬다. 그는 화려한 프로시합의 영광보다 더 힘들 수밖에 없는 바둑보급 지도자의 길을 개척하여 바둑 인구의 저변 엘리트바둑이 확대를 위한 평생의 업으로 선택한다. 1980년부터 어린이 바둑교실, 양상국 바둑교실, 성균관대 사회교육원 바둑강의를 계속하면서 바둑의 길을 삶의 길로 걸으며 후진양성과 초지회(初志會)라는 큰 그릇으로 1천 명이 넘는 아마추어 애기가들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같이 한다. ​2010년에는 1990년 EBS 교육방송 개국과 함께 시작한 ‘EBS 바둑교실’이 1,000회를 돌파한다. 바둑 전문 TV가 없던 불모지에서 공중파 바둑방송 프로그램을 단기필마로 개척한 방송사상 20년 동안 한 주도 결방이 없는 유례없는 영광의 금자탑이었다. 2002년에 개봉된 인기영화 ‘공공의 적’에서도 평범한 중년의 일요일 오전의 일상을 그린 장면에 ‘EBS 바둑교실’의 화면이 비칠 만큼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기립 박수 속에 찬사를 받는 영광의 순간이어야 했다. 많은 시샘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일이관지(一以貫之)한 나의 길(吾道)을 걸었던 고독한 월계관을 덤덤하게 받아 쓴 그이의 깊은 감회가 궁금했다. 등고산(登高山) 망사해(望四海)의 마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그의 인간승리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양상국 사범과의 인연은 30년이 다 된다. 엘리트바둑이 1996년 아마추어 5단 ‘인허’증으로 머리를 얹어준 사부가 그이다. 2007년부터 한국기원 이사를 맡아 이사회에서 양 九단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이는 한국기원 감사로 20년 넘게 재직하면서 프로기사를 대표하여 기원행정의 중심을 잡아주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이의 회갑기념으로 2009년에는 《바둑의 길, 삶의 길》이라는 두툼한 자서전을 나남출판사에서 간행하여 우리 사회의 일각을 늠름하게 비추었던 그이의 내공을 공유할 수 있게 하였다. 바둑교육의 교과서로 발행한 《사활의 묘》(전2권, 2000년), 《절묘한 맥》(전5권, 2015년)은 바둑계의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10여 년 전 경기도 포천에 20만 평의 나남수목원을 일굴 때 궁금하다며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와 격려했던 우정도 깊이 새기고 있다.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의 갑작스런 사퇴로 2018년 늦가을에서 다음해 봄까지 다섯 달 동안 내가 한국기원 총재대행을 맡아 한국기원 정상화에 동분서주할 때 양 사범의 우정에 크게 빚을 졌던 일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우리가 다른 별로 갈 때까지 지구에 소풍 온 남은 날들도 건강하게 더욱 엘리트바둑이 행복하기를 서로 빌어본다.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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